[한국일보]차별로 얼룩진..파트타임 노동자의 '내돈내산'작업복
덕지덕지 묻은 시꺼먼 기름때, 거칠게 뜯겨 나간 소맷단, 낡고 해진 이 작업복의 주인은 경남 김해의 한 철물 가공공장에서 일하는 서진석(29, 가명)씨다. 퇴근 후, 종일 흘린 땀이 흠뻑 밴 작업복을 벗으면 뿌연 분진이 날리면서 철가루가 후드득 떨어진다.
“가정용 세탁기로 빨면 물만 겨우 끼얹는 수준이에요. 철가루가 워낙 많이 떨어져 고장도 잦고요. 하는 수 없이 손빨래를 하는데, 이렇게 누빔 처리가 된 겨울 작업복은 한 벌 빠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이틀만 입어도 기름과 먼지, 땀이 섞여 쿰쿰한 냄새가 풍긴다. 참고 입는 것도 고역이고, 매번 손빨래를 하는 것도 고역이다. “동료들은 버릴 때까지 그냥 입더라고요. 어차피 금세 더러워지는 옷인데, 빠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일반 세탁소에선 받아주질 않으니, 드물게 있는 전문 세탁소를 찾아야 하지만, 휴식 시간을 쪼개 오고 가는 것이 번거로워 단념하기 일쑤다.
여수 국가 산업단지에서 16년째 보온공으로 일하고 있는 김태곤(49)씨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작업복을 직접 구입한다. 정규직에게는 분기마다 꼬박꼬박 작업복이 지급되지만, 김씨에겐 딴 나라 얘기다. 짧게는 2주, 길게는 2~3달씩 일하는 ‘파트타임’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상하의에 재킷까지 갖춰 구매하려면, 시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발품을 팔아도 7~8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부담이 만만찮다.
일터에 버젓이 비치된 세탁기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세탁기뿐 아니라 샤워실, 화장실도 오직 ‘정규직 노동자’만 쓸 수 있는 전용 시설이다. 어쩔 수 없이 부인과 아이가 함께 쓰는 가정용 세탁기에 작업복을 돌린다. 작업복에서 흘러나온 유해물질이 식구들 옷을 오염시킬까 봐 따로 세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언젠가 아이들 피부에 트러블이 올라와 붉게 덧나 있더라고요. 다 제 작업복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죠.” 그는 오염된 작업복이 가족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죄책감에 항상 시달린다.
노동현장에선 ’필수 장비’인 작업복, 어째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나요?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작업복은 ‘옷’이기 이전에 ‘장비’다. 기름이 줄줄 흐르고 사방에서 불똥이 튀는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신체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방패막이기 때문이다. 유독성 물질을 취급하는 현장에선 그야말로 '생명줄'에 가깝다.
깨끗하고 튼튼한 작업복을 입을 권리는 곧 ‘안전하게 건강을 지키며 일할 권리’와 직결되지만, 언제나 ‘대수롭지 않게’ 취급된다. 사업주들은 작업복 관리를 ‘노동자의 책임’이라고 여기고, 노동자들 또한 ‘작업복은 어차피 더러워지는 옷이니 세탁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법규상으로도 그렇다. 산업안전보건법상 명시된 의무 지급 항목은 안전화와 안전모가 전부다. 작업복은 포함되지 않는다.
일용직 노동자는 ‘정규직이 입다 버린 작업복’ 몰래 주워 입기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업장 규모에 따라 작업복 지급 현황이 천차만별이다. 규모가 큰 대기업 사업장의 경우 분기별로 새 작업복을 지급하고 2~3일에 한 번씩 세탁까지 해주지만, 10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에선 이른바 ‘통돌이’라 불리는 구형 가정용 세탁기를 가져다 놓고 ‘세탁시설’로 갈음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심지어 업무 도중에 작업복이 훼손돼도 자비로 새것을 사다 입어야 한다. 중소기업 공장 노동자들의 작업복 중 의류 브랜드 로고가 박힌 청바지가 적지 않은 이유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작업복을 '내 돈'으로 마련해야 하니, 한 달에만 많게는 수십만원이 ‘작업복 구입 비용’으로 나간다. 여수산단에서 도장공으로 일하는 김열곤(54)씨는 “오죽하면 정규직 사원들이 입다 버린 작업복을 주워다 빨아 입기도 했겠냐”며 “설상가상으로, 위험 물질을 취급할 때 쓰는 장갑도 딱 한 켤레씩만 지급돼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현재 김씨는 가족과 함께 쓰는 가정용 세탁기에 페인트와 시너가 묻은 작업복을 돌린다. 페인트를 희석하는 시너에는 벤젠, 톨루엔 등의 유해물질이 함유돼 있어 피부나 호흡기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렵사리 공공 작업복 세탁소 문 열었지만… 사업주들 '노동자 작업복 세탁비를 왜 우리가 내나'
작업복만을 전문으로 세탁하는 경남 김해의 ‘가야클리닝’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19년 11월 문을 열었다. 김해 지역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벌당 500~1,000원에 작업복을 세탁해 준다. 지자체가 비용을 대고 지역 자활센터가 운영을 담당하는 일종의 ‘공공사업’이라 세탁비용이 파격적으로 저렴하다.
'고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김해의 한 기계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박모(42)씨는 “작업복에서 이물질이 너무 많이 나와 가정용 세탁기에 돌리기에 부담이 됐는데, 이런 서비스가 생겨서 좋다”며 “주변 동료들에게도 널리 알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철물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서진석(29, 가명)씨 역시 “고된 손빨래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며 웃었다. 인근 창원 지역 노동자도, 일용직 노동자도, 자동차 정비공들도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일부 업장의 경우 사업주가 세탁비를 지원하기도 하는데, 대다수 사업주들은 ‘노동자의 작업복을 왜 사업주가 책임져야 하나’라고 반문한다. 세탁비가 아무리 저렴해도 ‘부담스러운 비용’이라는 것이다. 사업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유은혜 김해자활센터 사회복지사는 “노동자들이 사측에 세탁소를 이용하자고 건의를 해도 잡무가 는다고 생각해 묵살하거나, 굳이 들이지 않아도 될 돈을 들인다고 생각하는 사업주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가야클리닝 직원 김경석씨 역시 “실제로 사업주들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라며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범사업 당시에만 이용하다가, 이탈한 곳도 많다”고 전했다.
전문가들 "‘작업복 세탁권=노동자의 기본권’으로 여기는 인식 앞서야"
노동계 전문가들은 ‘세탁할 권리가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안전권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대훈 전 전국플랜트노조 여수지부 지부장은 “유해물질이 묻은 작업복을 가정에서 세탁할 경우, 가족의 건강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배관을 공유하는 이웃들의 건강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일본에서는 ‘구보타기계’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부인들이 남편의 작업복을 세탁하며 떨어져 나온 석면에 장기간 노출돼 폐암으로 숨지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작업복 세탁소’를 처음으로 제안한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은 “아직도 여수산단, 충남 대산화학단지, 광양제철소 등지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자비로 구매하고 세탁도 가정에서 하고 있다”며 “작업복 지급과 세탁에 관한 기준을 안전모나 안전화처럼 ‘법규상의 의무’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이누리 인턴기자 nurisworking@gmail.com
서동주 인턴기자 dongjoo2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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