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일이 부른 마음의 병, 이겨도 끝이 아니다

관리자 | 2021.02.24 09:36 | 조회 889
[일이 부른 마음의 병] ④이겨도 끝이 아니다


회사 업무로 마음의 병이 생긴 직장인, 노동자에게 산업재해 승인은 최소한의 위로다. 정신질환이 산재로 인정되면 아파서 쉬는 기간 치료비를 지원받는다. 직장 내 지위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산재 승인 이후 현실은 더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다. 치료 후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대부분 복귀에 두려움을 느낀다. 마음에 상처를 준 회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서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을 겪은 사람들은 복귀해서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산재 받았지만 회사 떠납니다.”

울산의 한 자동차부품 공장에 다니던 조모(41)씨는 지난해 1월 근로복지공단에서 정신질환 산재 승인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 탓에 그에게 우울증이 생겼다는 인정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이다. 조씨는 취재팀과의 통화에서 “산재 승인이 났을 때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산재) 승인이 나면 나아질 거다. 그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산재 요양 10개월간 쉬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30일 요양기간이 종료됐다. 복귀가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괴롭힌 사람들이 그대로 회사에 남아 있었다. 조씨는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은 승진까지 했다. 그들과 회사에서 마주하면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병가휴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조씨는 “산재 승인 당시 회사가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할 테니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소송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요양 기간이 끝날 때까지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조씨는 “회사에 전화해보니 돌아갈 부서 배치도 결정되지 않았고 ‘일할 자리가 없으니 휴직을 하라’고 했다. 사과는커녕 ‘회사 들어오기만 해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조씨는 “이제는 ‘내가 괴로운 만큼 그 사람들도 고통을 겪으면 좋겠다’는 복수심만 남았다”면서 “회사가 처음에 사과만 제대로 했어도 이렇게 마음의 상처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질환 산재를 인정받은 사람들은 치료를 마친 뒤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일상을 꿈꾼다. 하지만 직장으로 돌아가는 건 쉽지 않다. 조씨 사례처럼 회사가 바뀌지 않고 가해자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복귀를 앞둔 직원을 엉뚱한 자리로 발령내는 회사도 있다. 당사자들은 복귀할 엄두를 못 내고 직장과 일을 포기하게 된다.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대표는 “작은 회사일수록 (산재 승인 이후) 복직이 더 어렵다. 정신질환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질환을 유발시킨 가해자가 사업주인 경우가 많다. 본인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사람이 이상한거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노동자들이 다니던 직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사업주에게 지원금을 지급한다. 신체·정신질환 산재 모두 포함되는데 장해 등급에 따라 최대 월 80만원(연 최대 960만원)을 지원한다. 산재 노동자들이 원활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직장적응 훈련도 지원한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노동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사업주가 꺼리는 경우가 있다. 사업주의 경제적 손실을 덜어주고 복귀를 지원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해당 사업장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지원 제도는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게 된다. 전문가들도 각 기업의 변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한편 어렵게 산재가 인정돼도 회사가 이에 불복해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 박모(54)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 안세훈(가명)씨의 죽음이 업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산재를 청구해 승인 결정이 난 것이다. 그렇지만 회사가 제기한 산재취소 소송 탓에 또 다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남편 안씨는 건설현장 공사팀장으로 일하다 낯선 현장에 배치돼 과중한 업무를 수행했다. ‘출근길은 지옥행’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남편의 산재 승인을 받고 마음의 정리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산재 인정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퇴직금 지급 여부를 두고 박씨와 회사가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이었다. 회사 직원은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사장님 굉장히 화난 상태”라고 말했다.


박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답답함이 더해져 한동안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그는 “잠도 오지 않고 미칠 것 같았다. 우울감이 평생 갈까 두려웠다”면서 “회사가 소송에서 이길 경우 그간 받은 유족급여를 전부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1심에서 회사가 패소했다. 회사가 항소하지 않아 남편은 그대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박씨는 “1년여간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강민정 과로자살유족모임 운영자는 “회사의 ‘보복성’ 취소 소송으로 유가족들을 더 괴롭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회사의 이의제기권인 산재취소 소송을 아예 막을 순 없겠지만 악의적 소송이 이어질 경우 산재 신청을 주저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 남성이 23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사무실에 들어가고 있다. 질판위는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곳이다. 윤성호 기자

회사가 인정하지 않는 이유

정신질환 산재가 승인되더라도 사업장에 보험료 상승 등 직접적인 불이익은 가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재해조사 단계에서 직원의 업무상 스트레스를 순순히 인정하는 사업주는 거의 없다. 소송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김승현 대표는 “산재 승인이 나면 곧 민사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대부분 회사가 재해조사 단계부터 산재를 인정하지 않고 방어를 한다”고 말했다.


2019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손원경(가명)씨의 형도 동생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지난 18일 경기도 이천에서 취재팀과 만난 형 손모씨는 “동생의 죽음 이후 인생이 바뀌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15년 동안 운영하던 학원을 접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 중이다. 소송 이유를 묻자 그는 “정당한 보상을 받아 동생의 죽음이 회사의 잘못된 복지 제도와 업무 시스템 탓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동생은 회사의 중국 법인장으로 근무했다. 자금난으로 직원들 월급과 출장 경비가 지급되지 않자 사비로 이를 충당했다. 2018년 한 해 중국 내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간 횟수가 60회에 이를 정도로 업무가 많았다. 근로복지공단은 그가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에 이르렀다며 2019년 12월 산재를 승인했다.


그렇지만 산재보상금은 가장을 잃은 가족이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유족연금은 평균 임금의 365일치를 계산한 뒤 이 중 47%에 해당하는 금액에 가산금액(연금 수급자의 365일치 급여의 5%)을 더하는 방식으로 산정된다. 일시금으로 받는 경우에는 수령액이 평균 임금의 1300일분에 그친다.


손씨 동생의 아내는 중국 국적의 외국인이어서 매달 지급받는 연금이 아닌 일시금으로 산재보상금을 받아야 했다. 앞으로 매달 받을 수 있는 돈은 국민연금의 유족연금 월 18만8000원 정도다. 회사가 동생 앞으로 가입한 보험에서 보험금 4600만원을 받았지만 충분하지 않게 느껴졌다.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자살 산재 승인을 받은 고(故) 손원경(가명)씨의 형이 지난 18일 경기 이천시 추모의집에서 동생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천=윤성호 기자


손씨는 민사재판 과정에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회사와 또 싸우고 있다. 회사는 소송이 시작되자 동생의 가정불화를 강조했다. 이에 손씨는 “동생이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육아를 돕지 못해 아내와 다툼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게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며 “그런데도 회사는 동생이 가정불화로 죽었다고 집요하게 몰아가고 있다. 산재 승인이 났는데도 사과는커녕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세은 이대서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는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하고 사업장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그 출발이 산재인데, 사업장 문제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신체 산재가 정신질환 불러오기도

업무상 정신질환은 일하다가 몸을 다치면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다. 신체가 절단되는 사건을 겪었거나 동료의 중대 재해 장면을 목격한 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생기는 것이다. 신체 산재를 승인받으면서 잦은 결근과 조퇴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직장 내 고립감이 생기기도 한다.


지역의 한 도시철도공사 토목직으로 일했던 A씨는 선로 궤도 보수 업무를 하다가 천식을 얻게 됐다. 곡선으로 열차가 꺾이는 부분은 선로에 크롬을 입히는데 이에 노출돼 입사 3년 만에 천식이 발병한 것이다. 발작 증세까지 나타난 A씨는 자주 병가를 내거나 조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받고 복귀해도 크롬에 노출되면 또 다시 증세가 악화했다. 그 무렵 A씨의 업무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은 동료들의 비난도 시작됐다. A씨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시에 직장의 ‘문제 직원’이 돼 있었다.


A씨는 천식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돼 산재 승인을 받았다. 신청부터 승인까지 2년이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우울과 불안장애가 발병했다. 신체 질환에 이어 정신질환이 생긴 것이다. A씨의 산재 승인 과정을 함께한 노조 측 관계자는 “직업병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위축되는데다 신변을 비관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측이나 동료들의 지지 없이 산재를 신청하면 외로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A씨는 우울과 불안장애가 심해져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산재를 추가 인정받았다.


A씨는 1년간 정신질환 치료를 마치고 지난달 회사에 복직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업무 적합성 평가에서 특정 업무(크롬 노출 환경) 배제를 조건으로 복직 결정이 내려졌다. 토목직으로 입사했던 A씨는 전공과 관련 있는 연구소로 발령 받았다. 노조 측 관계자는 “정신질환 산재 문제는 조직 내 변화가 없다면 또 다시 다른 요인이 트리거(기폭제)가 돼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라며 “복직 후에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노조가 살피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산재사고를 겪은 노동자는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고 심한 경우 자살에 이를 수 있는 고위험군이라고 지적한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몸이 다친 것 자체가 육체노동자에게는 위기다. 노동시장에서 퇴출될 위험에 놓이거나 노동력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산재사고를 당한 이들은 고위험 집단이므로 조기 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심각한 사고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나 적응장애 등이 발병한 경우에는 재해조사 시 업무상 스트레스 조사를 생략하는 등 조사 과정을 단축해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며 “정신질환을 동반한 산재 노동자의 경우 조기 심리검사를 통해 산재트라우마센터와 연계하는 등 다양한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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