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대화-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관리자 | 2013.04.29 10:35 | 조회 1743

일시: 2013. 4. 26(금) 늦은 7시

장소: 부천시비정규직근로자 지원센터 교육실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2013426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주한

1. 왜 한국사는 죽어있을까?

세계에서 한국만큼 자국 역사를 소홀히 여기고, 의미나 흥미를 잃게 하고, 암기해야 할 지겨운 교과서 과목으로 전락시킨 나라도 없다. 영어 단어 하나가 자신의 역사를 아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겨지는 풍토다.

 

한국사는 죽어 있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그랬을까? 한국사만 유독 태생적으로 이런 성격을 가졌을 리 없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점과 계기, 그리고 여기에 개입한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어떤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사적 시각이다. 그중에서도 누가, , 어떻게?” 하는 의문이 핵심이다.

 

2. 한국사의 태두 -이병도

한국사를 보는 시각과 이론에는 이른바 정설이란 것이 있다.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현재의 시각에서 늘 새롭게 쓰이는 것이 역사인데,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정설이란 것을 만들어, 다른 해석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이단시한다. 역사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fact을 무시하거나 은폐하고 왜곡하는 풍토가 뿌리 깊다. 그 뿌리를 캐보면 결국 한국사의 태두 이병도가 등장한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관으로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시작한 이병도는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국사학계 대부가 되었다.

 

3. 한국고고학의 태두 김원룡

 

한반도 남부에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기관이 있으려면 삼국이 일찍이 고대국가로 발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삼국사기앞부분, 삼국사기초기기록을 가짜로 몰아야 했다. 이것이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삼국사기초기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수백 년 뒤에 발견된 광개토대왕 비문과 무령왕릉의 기록을 통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은 검증되었다. 그러자 김원룡은 원삼국原三國 시대라는 해괴한 개념을 들고 나와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계속 유일한 정설로 만들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스에마쓰에게 일제 식민사학을 전수한 그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과 교수, 같은 대학의 대학원장을 지냈고, 역사학회 회장, 한국고고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원룡은 한국 고고학을 일제 식민사관에 꿰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신라 유물이 나오면 신라 유물, 백제 유물이 나오면 백제 유물이라 하지 않고, 원삼국시대 유물이라고 하면서 세계에서도 그 유래가 없는 희한한 고고학을 창안했다.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으려면 삼국은 원시상태에 있어야 했다.

문헌사학자는 이병도가 만들어 놓은 틀, 고고학자는 김원룡이 세운 정설을 따라야 한다. 제국주의 역사학, 제국주의 고고학을 태생적으로 견지한 한국주류역사학계는 대일본제국 산하 한국지부 학술원인 격이다.

 

4.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1945,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로 승계되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가 친일파 손에 청산되면서 한국사 원형과 진실은 철저하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는 이른바 실증주의로 치장됐고, 조선사편수회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과학적 역사학은 신념이 앞선 관념론’, ‘국수주의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국사는 죽었다.

 

5. 한국사 철의 법칙

5-1. 식민사관의 대전제, 핵심 명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 역사는 짧았고, 영역은 좁았다.

2. 한국은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3. 한국민족은 주체성이 없어 타민족의 영향과 지배를 받아야 발전했다.

4. 한국은 천여 년 간 사회적·경제적으로 정체된 사회였다.

5. 한국민족은 열등하고, 사대성과 당파성이 심하다.

6. 일본의 한국지배는 필연이고 당연하다.

7. 한국은 일본 통치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대전제요, 핵심명제다. 물론 한국주류역사학계는 절대 이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현란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런 전제를 바탕에 깔아두고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르다.

 

5-2. 이 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국 주류 역사학계 부동의 정설이 수립된다.

 

1.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2. 위만이 고조선을 통치하면서 고조선은 비로소 국가로 성장했다.

3.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세운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다.

4. 중국과 일본의 지배로 한국은 발전했다.

5. 삼국사기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모든 이론과 견해가 이런 대전제에 입각해 있다. 절대 그들은 이 견해를 벗어나는 경우가 없다. 이 이론과 견해에 맞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한국의 역사를 구성한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이미 정해진 프레임에 맞추느라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사실史實을 부정하고, 중국과 일본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말한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비학문적 수단까지 동원해 정설을 사수해왔다. 정설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설의 논리를 역사학적 방법으로 검토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6. 고조선이 없으면 한국이 없고 우리가 없다

 

6-1. 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적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 신화가 전하는 내용과 역사적 배경은 엄격히 분리해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앙일보, 2012918

 

6-2. 일제는 한국 침략과 지배를 위해 고조선 역사부터 훼손했고, 한국은 예로부터 식민지 역사, 주체성이 없는 타율적 한국사라는 역사상을 세웠다. 자립성이 없어 외세의 영향과 지배를 통해서만 발전하는 정체의 역사, 이런 허구의 역사’, ‘집단 기억 왜곡으로 일제는 한국인에게 모멸감과 열등감, 상실감과 체념, 무기력한 숙명론을 심으려고 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배경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조선사편수회 지침대로 한국사를 근원부터 거세한다. 동북아역사재단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중화민족이 되고, 한국사는 뿌리를 잃게 된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주장이 없다. “너희 나라 역사학계의 견해 아니냐?”라고 하며 그들은 거침없이 역사를 침탈하고 있다.

 

6-3. 한국사는 단군조선부터 시작해 통상 반만년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이를 잘못된 역사왜곡으로 단정한다. 단군은 역사가 아니라 허황된 신화일 뿐이고,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생긴 지 반만년이 아니라 2000년도 채 안 되었다고 주장한다.

 

6-4. 기원전 7세기 전후한 시기의 고조선을 초기 고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조선은 일정한 정치체나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역집단이나 종족집단에 불과한 상태였다.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63

 

6-5. 이 책에서는 단군조선 문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단군조선은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갖추었을 때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건국신화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를 통해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대 신화의 요소를 빌려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단군조선은 단지 신화일 뿐, 역사적 사실로서 그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63~64

 

6-6. 가령 단군이 고조선을 개국한 해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이다. 국가가 형성되려면, 최소한의 객관적인 조건으로 농업경제와 청동기 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그런데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그런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려면 빨라도 기원전 12세기를 올라갈 수 없다....중략.... 고려 후기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그 뒤까지 이어지는 그러한 의식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실제 사실이 그러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16-17

 

외국의 역사학자가 보면 이런 불가사의한 주장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당신의 주장은 1차 사료에 근거한 것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나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모두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7. 단군 신화는 말 그대로 단군과 관계된 단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화이다. 그리고 신화와 역사는 별개의 것이다.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121

 

신화와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논리는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되었. 유럽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했다. 유럽 학자들은 인종적으로 열등한 이집트나 오리엔트 인들이 그리스 땅에 도래해 정복왕조를 세우고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일으켰다는 그리스 신화의 기록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실증주의를 내세워 그리스 신화를 허구로 몰았다.

 

6-8. 평생 신화를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역사학자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고대사회에서 신화가 갖던 가치를 거의 그대로 갖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역사입니다라는 말에서 보듯 그가 생각하는 신화는 역사의 원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류 역사학계는 단군조선은 단지 신화일 뿐, 역사적 사실로서 그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면서 역사의 원형인 신화를 부정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황국사관이 갖던 가치를 거의 그대로 갖는 영역이 바로 주류 역사학계다.

 

6-9.사기를 살펴보면 상나라가 나온다. 사마천司馬遷은 상나라가 망하고 1천 수백 년이나 지난 시대의 사람이었다. 상나라 유적은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20세기에 와서야 우연한 기회로 갑골문甲骨文이 한자의 원형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설 속의 상나라가 역사였음이 증명되었다. 갑골문이 대량 발견된 곳은 상나라 수도인 은이 있던 자리, 즉 은허殷墟였다. 이것이 역사다. 하물며 단군조선을 증명하는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가 내몽골 일대에 널려 있는데도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인정하지 않는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은 인정하면서 고조선조는 믿을 수 없다는 의도적인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6-10.송호정 교수는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일보, 2003212

 

6-11. 한국고고학회에서 최근에 발간한 한국 고고학 강의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개시 시점을 서기전 10세기로 보게 되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90년대에는 무문토기가 서기전 15세기에 발생했고 청동기시대도 서기전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어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한국고고학회, 한국 고고학 강의, 사회평론, 2010, 84

 

주류고고학계는 청동기 개시 연대를 사실상 서기전 10세기로 보고 서기전 15세기는 논의 중이라니 서기전 24세기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서기전 2500년경으로 이미 오래전에 밝혀졌다. 과학적인 연대측정방법에 의해 밝혀진 연대가 이러함에도 주류식민사학계는 자기들이 고수해온 연대보다 너무 올라간다는 이유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과학적인 연대가 나왔는데도 없는 사실처럼 치부한다.

 

6-12. 그러나 고조선사가 한국 고대사의 한 시기이고 첫 국가인 만큼 이제는 고조선사의 실상이 무엇이고 한국 고대사 전체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고고학자료와 문헌자료를 종합한, 진지하고 치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특히 고조선사 연구의 최종적인 판단은 문헌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이때 제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후대의 믿을 만한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송호정 논문의 마지막 결론부분)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2008.

 

6-13. 한국을 최초로 외부 세계에 알린 책으로 유명한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단군과 고조선을 실재한 역사로 소개했다. 그리피스는 한국사 최초 국가로서 고조선을 서술하며 그 영역을 한반도를 포함한 요동지방까지로 설정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 것이다.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도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고고학자들이 10만 년 전에 한반도에 사람이 거주했다고 밝히는 것에 비하면, 단군의 고조선 개국은 상당히 최근세에 해당한다. 1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이 땅에 살았던 인류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유럽족인지 몽고족인지 혹은 또 다른 인종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지녔던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러나 단군시대에 와서는 이런 것들이 보다 분명해진다. 기원전 2천 수백 년 전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들이 이 땅에 군림했다는 사실이 단군 이야기로 응축돼 전해진 것이다.

-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6-14.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닌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고, 고조선은 원시적인 부락이었다가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온 위만에 의해 겨우 국가로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곧 망해 중국 한나라가 한반도 북부에 설치한 한사군 식민 통치를 통해 한국사는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정교하게 이론화한 한국사의 출발이다.

 

 

 

7. 한사군은 한국사 원형을 가르는 척도

7-1. 한사군 문제는 한국사 원형을 가르는 척도다. 한사군의 위치와 성격에 따라 한국사의 기본 틀이 완전히 바뀐다.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인물 또한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이다. “한국사는 주체성이 없어 주변 민족의 지배와 간섭,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타율성에서 벗어나 발전했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이다.

 

7-2.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를,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니 일제 식민지배는 한국사의 숙명이라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다. 한사군=한반도설을 앞세운 타율성론은 한국사는 만주의 부속역사라는 만선사관을 창조하고 그에 입각해 사대주의론·반도적성격론을 만들어냈다. 한국 주류 식민사학계는 고조선은 멸망 당시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고 전제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어서 국가로 성장했다가 바로 망했다는 것이다.

 

7-3. “중국이 기원전 16세기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고조선은 원시적인 부락집단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사군, 특히 한반도 평양지역에 있던 낙랑군이 400년 이상 존속하면서 한국에 선진 문물을 전해준 결과 한국사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한사군 위치에 준해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옥저의 위치가 정해지니 한국고대사의 강역은 보잘 것 없어진다. 한사군의 위치에 따라 만리장성의 위치가 정해지고, 삼국유사삼국사기기록의 진위여부도 결정된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관의 전제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가 재구성되었고, 이병도, 이기백, 김정배, 이기동, 서영수, 노태돈, 송호정 등이 학문권력을 유지해왔다.

 

7-4. 이와 관련해서 2011227SBS 스페셜에서는 3·1절 특집으로 역사전쟁-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사군의 위치가 한국사 최대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확정한 세키노 타다시 조사단의 유물을 한 번도 재검증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직접 유물검증에 나선 것이다.

 

이 방송에서는 현대의 다양한 분석기법과 관련 전문가들을 동원했는데, 가능한 한 유물들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고미술협회장, 디지털 과학사진팀 교수, 사진전문가, 중국어과 교수, 금석원 원장, 중요무형문화재석장, 탁본 전문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이렇듯 한국사에 대한 관점과 편견이 작용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분석 과정에서 역사전문가들은 배제했고, 나중에 방영할 때만 시청자의 이해를 돕는 선에서 역사학자를 등장시켰다. 그 결과 점제현 신사비 조작과 효문묘 동종이 한 개가 아니란 의혹이 제기되었다.

 

7-5.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위치를 중국 고대 사서들은 일관해서 요동으로 기록했다.

한서》〈설선열전, 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후한서》〈최인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후한서》〈광무제본기,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사기》〈하본기주석,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 리)장성의 기점이다.

 

너희 나라 고대사서의 기록이다, 무슨 소리냐?”하면, 중국 측은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주류사학계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이권이 무너지고 쌓아온 업보가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7-6. 최소한의 사료 비판만 해도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은 설 자리가 없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한사군 위치 비정을 한국역사학계는 아무런 비판 없이 따른다. 한사군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한사군 설치 당시의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

기원전 1세기경 사기나 서기 1세기경한서, 3세기 후반삼국지, 5세기경 고대 남송의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고대 사료들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 1차 사료를 해석한 2차 사료보다 1차 사료를 우선해야 한다. 역사학의 기본이다. 중국 고대 사료는 일관되게 한사군 중심지인 낙랑이 요동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인 패수가 지금의 난하라는 사실도 중국 고대 사료에 근거해 어렵지 않게 비정할 수 있다. "패수가 압록강이다 청천강이다" 하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그렇다.

 

7-7.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기사만으로도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라는 논리는 존립할 수 없다.

 

그 뒤에 (고조선 임금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고, 조선은 마침내 약화되었다.

 

7-8. 한국의 발전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진·한 교체기에 위만이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온 후, 기원전 194년 왕검성을 공격해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였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36, 2003

 

7-9. 중국의 마대정馬大正중국의 동북변강 연구에서 우리들이 종사하는 학술 연구는 순수한 학술 연구가 아니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학술 연구이다라고 말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 연구지 학술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정자, 고대 중국 정사의 고구려 인식, 서경문화사, 2008, 15

 

8.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8-1. 오히려 한국 고대사학자들을 한국인의 가면을 쓴 일본인이라고 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다므기, 2011, 253~254

 

나는 이미 1985년에 이병도(서울대), 이기백 (서강대), 이기동(동국대) 등의 한국 고대사학자들이 일본인 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사기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 일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이병도, 이기백 씨는 화답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고, 이기동 씨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아직 가타부타 회답을 주지 않고 있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다므기, 2011, 153

 

8-2.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등을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학자 ,즉 문헌고증자라고 칭찬하였는데 그 증거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다므기, 2011, 248~249@@

 

최재석은 다음과 같은 한탄을 덧붙였다.

 

8-3. 솔직히 말하여 나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불가사의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병도 선생부터 시작하여 이기백, 김철준 교수를 거쳐 이기동 교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고대사학자들이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사기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고 법석을 떨어도 다른 우리나라 고대사학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킨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학자들이 침묵만 지키는 것은 권위주의 위계질서가 엄존하여 스승이나 선배의 글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들 이외의 다른 고대사학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늘 불가사의로 보인다.

 

8-4. 그리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고대사학자 노태돈 교수에게도 한 마디 하겠다. 고대사학자라면 여기에 대하여 한 마디 정도의 논평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것은 강도에게 훈장을 주는 것과 같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8-5. 삼국사기초기 기록을 인정하면 임나일본부를 사실로 만들 수 없고 황국 일본이 고대부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할 수 없었기에 쓰다는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신라는 4세기 후반 나물이사금 때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초기 고대국가를 이룩할 단서를 잡았으나 고구려의 간섭 속에 이루지 못하고,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때에 와서 단위 정치체인 6부를 왕권에 종속적으로 연합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였다.

-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8-6. 주류 식민사학계는 겉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하는 척했다. 임나일본부설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가는 매국노라는 자신들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하는 척하면서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은 정설로 만들어놓았다.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은 동전의 양면임에도 한쪽으로는 부인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더 강고하게 유지해왔다.

 

9. 역사를 바꾸면 역사가 된다

 

9-1. 일제는 한국을 침략한 이래 한국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했고, 한국의 교육 전반을 장악했다. 일제 식민사관과 교육시스템은 식민 지배를 영구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요 무기였다. 일제는 경성제대를 설립해 조선의 상류층 일부를 조선총독부 하급관리로 편입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총독부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며 일제에 충성했다. 일제는 황국사관에 입각해서 주어진 지배가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일부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바로 경성제대 출신들이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과 역사, 사상과 문화를 저급하게 여기고 민족을 부정하거나 열등감을 조장하는 교육을 해왔다.

9-2. 자연과 인간, 사물에 대한 주체적인 회의와 사유를 거세했다. 이것이 따지지 말고 외우는 주입식 교육이 만들어진 연원이다. “요컨대, 조선 교육은 이치를 캐는 자를 되도록 적게 해야 한다.” 이것이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이었다. 한마디로 천황에 대한 노예의식을 가슴깊이 새기는 교육이었다.

 

9-3. 거창고등학교 전성은 교장은 그의 저서 왜 학교는 불행한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식민지 국가에서 하던 정책을 그대로 따라하는 비인간적인 제도이다.”

 

9-4. 서울대학교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신분사회는 해방 이후 해체되기는커녕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온 국민은 이 시스템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학생들은 이 시스템의 부속물처럼 암기하기에만 매달린다.

 

대한민국 교육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서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어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을 토로한다. 이 시스템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교육의 혁신을 원하지 않는다. 이 교육 시스템을 통해 이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 시스템은 지배체제의 정수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늦게 바뀔 부분이 바로 교육이 아닐까? 일제가 패망한 지 68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일제가 만든 교육 시스템이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일제가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교육 시스템을 통해 주입해왔는데도, 광복 후 한국은 이를 해체하지 못했다. 서울대학교는 일제가 경성제대에 부여한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해왔다. 서울대학교 공화국은 이렇게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9-5. 인간은 기억으로 산다. 기억은 정체성의 핵심이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언어를 꼽는다. 언어력을 상실한 이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잃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정체성은 마음대로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곧 기억이다. 일제가 한국을 영구히 식민으로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치밀하게 왜곡한 이유다. 사람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지 과거에 살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9-6. “‘을사늑약을사조약으로, 일본 국왕천황으로 바꿔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 사진 설명에서 김구를 삭제하라.”

2012년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심사에서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수정권고한 내용이다. 말이 수정 권고지 사실상 명령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개념을 정확히 할 것을 이유로 삼았는데, 그 개념은 이렇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 천황을 존칭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이다. 김구는 일본지배에 반대한 테러리스트다.” 반민특위 해체 이후 대한민국의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본의 한민족지방사편찬위원회로 편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9-7. 한국의 교육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능가하는 학벌서열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유력한 신분 질서체제 장치다. 중세 유럽의 주홍글씨처럼 소위 남보다 못한 학벌은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낙인이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서 온 힘을 다해 구명정에 올라타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처럼, 난파한 한국사회에서 학벌서열은 생존을 걸고 붙들어야 할 구조선이다. 하지만 그 구조선도 이미 침몰 중이어서 항구로 가지 못할 운명이다. 이런 시스템을 숙주삼아 식민사학이 정설로 행세해왔다. 식민사관의 문제는 교육 자체에 있다.

 

9-8. 식민사관 논란은 단순히 역사학계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관은 그 시대의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교육·젠더··예술 등 사회 전 영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 모든 문제가 식민사관에서 비롯하지는 않겠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없다. 식민사관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9-9.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이요, 역사관이다.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꿈과 희망이 사실로, 사실이 역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주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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